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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스차일드가문 세계금융의 숨은 지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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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로스차일드 가문 세계 금융의 숨은 지배자

     

     국제적 금융기업을 보유하고 있는 유대계 금융재벌 가문입니다. 로스차일드는 독일어 로트실트(Rothschild)의 영어식 발음으로 프랑스어로는 로쉴드라고 읽습니다. 나폴레옹 전쟁 이후 유럽 주요 국가들의 공채 발행과 왕가·귀족들의 자산 관리를 맡아 막대한 부를 축적했으며, 철도와 석유산업의 발달을 주도하며 유럽의 정치와 경제 등에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로스차일드 가의 기원

    로스차일드 가는 신성로마제국의 자유도시 프랑크푸르트의 게토(ghetto ; 유대인 거주구역)에서 대대로 상업에 종사하던 유대인 가문이었습니다. 18세기까지는 소규모 상인 가문에 지나지 않았으나 마이어 암셸 로트실트 대에 이르러 헤센 선제후 국의 재정관리를 맡으며 성장했습니다. 그리고 그의 다섯 아들 암셸 마이어 폰 로트실트, 잘로몬 마이어 폰 로트실트, 나탄 마이어 폰 로트실트, 카를 마이어 폰 로트실트, 야콥 마이어 폰 로트실트의 대에 와서는 각각 독일의 프랑크푸르트·오스트리아의 빈·영국의 런던·양시칠리아 왕국의 나폴리·프랑스의 파리에 은행을 설립해 유럽 전역으로 사업을 확대하면서 유럽 각국의 정치와 경제에 막대한 영향력을 지닌 금융재벌이 되었습니다.

    로스차일드라는 명칭은 그들이 붉은 문패(roten schild)가 달린 집에서 살았던 것에서 비롯되었습니다. 프랑크푸르트의 유대인은 법적으로 가문의 명칭을 지닐 수 없었으므로 로스차일드 가도 시대에 따라 ‘바우어(Bauer)’나 ‘한(Hahn)’ 등을 성처럼 사용해왔습니다. 하지만 1806년 나폴레옹의 침공으로 유대인에 대한 법적인 차별이 완화되면서 로스차일드를 공식적인 가문의 명칭으로 사용하게 되었습니다.

    프랑크푸르트에서 소규모로 환전상을 하던 마이어 암셸 로트실트는 헤센 선제후 국의 통치자인 빌헬름 9세의 신임을 얻으면서 성장하기 시작했습니다. 1789년 빌헬름 9세에게 정식으로 대부업을 승인받은 로스차일드 가는 1792년에 시작된 프랑스혁명 전쟁과 1803년에 시작된 나폴레옹 전쟁 과정에서 막대한 부를 쌓았습니다. 이들은 자신들이 구축한 정보망과 유통망을 배경으로 나폴레옹의 베를린 칙령 이후 가격이 폭등한 영국의 면제품 등을 몰래 들여와 팔면서 큰 이익을 얻었습니다.

     

     그리고 런던과 파리에 엔엠 로스 차일드 앤 선즈(N. M. Rothschild & Sons) 은행과 로쉴드 은행(Banque Rothschild)을 각각 설립하면서 본격적으로 금융업으로 진출해 상업어음의 발행과 대부업으로 큰 수익을 거두었습니다. 나폴레옹 전쟁 때에는 영국 정부를 도와 동맹국들에 보내는 자금 운송과 대부 사업 등을 벌였으며, 영국 전시 공채를 대량으로 매입해 워털루 전투에서 나폴레옹이 패한 뒤 큰 차익을 남기기도 했습니다. 프랑스에 다시 왕정이 들어선 뒤에는 국내로 돌아온 귀족들의 재산 관리를 맡아 투자 사업을 벌이며 부를 쌓았습니다.

     빈 체제가 성립한 뒤에는 유럽의 여러 국가들과 왕가들의 공채(公債) 발행과 재산 관리를 맡으면서 유럽 전역으로 사업을 확대했습니다. 1818년 프랑스가 동맹국들에게 치를 전쟁 배상금을 놓고 열린 엑스 라샤펠 회의(Congress of Aix-la-Chapelle)를 계기로 로스차일드 가는 공채 발행에 참여할 수 있는 권한을 인정받았습니다. 그리고 오스트리아 제국의 재상이던 클레멘스 메테르니히와의 긴밀한 관계를 배경으로 유럽 주요 국가들의 공채 공모와 채권 발행을 맡으면서 막대한 수익을 거두었습니다. 1822년에는 마이어의 다섯 아들 모두가 신성로마제국의 마지막 황제이자 오스트리아 황제인 프란츠 2세에게 남작의 작위를 받기도 했습니다.

     

     


    로스차일드 가의 성장


    마이어 암셸 로트실트가 죽고 그의 다섯 아들들은 각각 프랑크푸르트·빈·런던·나폴리·파리에 은행을 설립해 공채 발행과 자금 대부 등으로 각국 정부에 큰 영향력을 행사했습니다. 마이어는 죽기 전에 형제들 간의 협력을 강조하면서 일족 안에서의 혼인과 중요 직책의 계승을 유언으로 남겼습니다. 유럽의 주요 국가들에 자리 잡은 로스차일드 가의 다섯 분가(分家)는 친족 내의 혼인으로 서로의 결속을 다졌으며, 일가의 독자적인 연락망을 구축해 다른 경쟁자들보다 우수한 정보력을 지닐 수 있었습니다.

    19세기에 로스차일드 가는 철도산업에 대한 투자로 큰 수익을 거두었습니다. 독일 프랑크푸르트 본가를 맡은 장남 암셸은 바이에른 동부철도와 라인강 철도 등을 개설했으며, 오스트리아 빈의 둘째 잘로몬은 오스트리아 북부철도를 비롯해 중부 유럽의 철도망을 잇달아 개설했습니다. 프랑스 파리의 막내 야콥은 1837년 파리-생제르망 철도를 시작으로, 1846년에는 프랑스 북부철도를 개설했습니다. 이처럼 로스차일드 가는 유럽의 주요 철도망을 지배하면서 유럽의 산업화 과정에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이 밖에 수에즈 운하, 이집트 철도의 개설 등과 같은 각국의 투자 사업에 자금을 조달하고, 직접 해운회사와 철강회사 등에 투자해 운영하기도 했습니다.

    로스차일드 가는 전시 공채의 발행으로 전쟁이나 식민지 침탈에 필요한 자금을 유럽 각국에 제공하기도 했습니다. 그들은 유대인을 박해하던 러시아 제국과는 사이가 좋지 않아 1853년 크림 전쟁 때에는 러시아에 맞선 영국, 프랑스, 투르크 등의 연합국에 자금을 지원했습니다. 1904년 러일전쟁 때에도 일본의 전시 공채 발행을 맡았습니다. 그러나 1883년에는 러시아 정부에 공채를 발행해주면서 그 대가로 카스피해 연안 바쿠 유전의 채굴권을 얻어냈습니다. 이곳에서 로스차일드 가는 노벨 형제와 협력해 석유를 채굴한 뒤 유조선을 개발해 그것을 유럽 각지로 운송해 막대한 이익을 거두었습니다. 로스차일드 가는 미국 록펠러 가의 스탠더스 오일(Standard Oil Company)과 경쟁하기 위해 1914년에는 바쿠 유전의 채굴권을 로열 더치 쉘(Royal Dutch Shell)에 매각하고 그 회사의 대주주가 되었는데, 그 때문에 1917년 러시아 혁명으로 외국 자산이 몰수되었을 때도 큰 피해를 입지 않았습니다.


    로스차일드 가의 영향력 축소


    금권을 배경으로 유럽을 지배하던 로스차일드 가의 영향력은 19세기 후반 유럽의 각 나라들에서 민족주의가 고양되면서 점차 위축되었습니다. 프랑크푸르트의 본가는 장남인 암셸이 아들이 없이 죽자 넷째인 카를의 아들들이 뒤를 이었으나, 독일의 통일 과정에서 중심지로 떠오른 베를린으로 옮기지 않고 프랑크푸르트를 고집하다가 점차 쇠퇴했습니다. 오스트리아 빈의 분가도 합스부르크 왕가의 몰락과 더불어 영향력이 쇠퇴했고, 나폴리의 분가는 이탈리아의 통일과정에서 큰 피해를 입었습니다. 런던과 파리의 분가는 꾸준히 영향력을 유지하고 있었으나 통신기술이 발달하면서 정보력에서 다른 경쟁자들보다 크게 우위에 서기 어려워졌기 때문에 예전만은 못하게 되었습니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상속세가 강화되는 등 조세체계의 정비가 이루어진 것도 영향을 끼쳤습니다. 로스차일드 가의 은행은 주식회사가 아니라 일족의 소유로 기업을 폐쇄적으로 운영해왔으므로 상속세가 크게 적용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때문에 이 시기에 로스차일드 가는 19세기에 구입했던 호화로운 대저택의 일부를 잇달아 매각해야 했습니다.

    한편, 19세기 이후 유럽 각국에서 유대인 국제조직이 세계를 지배하려는 음모를 꾸미고 있다는 반유대주의가 확산된 것도 로스차일드 가의 영향력 축소에 영향을 끼쳤습니다. 이러한 유대인 음모설은 로스차일드 가를 겨낭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독일에서 히틀러의 나치 정권이 들어선 뒤에 로스차일드 가의 독일 내 재산은 차례로 정부에 몰수되었습니다. 1938년에 오스트리아가 독일에 병합된 뒤에는 빈 분가의 재산도 몰수되었으며, 1940년 독일이 프랑스를 침공해 파리가 점령된 뒤에는 파리 분가의 재산도 몰수되었습니다. 나치가 침공한 뒤에 빈과 파리의 로스차일드 가 사람들은 미국과 영국으로 망명했습니다. 빈 분가는 후계자가 없었으므로 제2차 세계대전이 종전된 뒤에 로스차일드 가는 런던과 파리의 분가만 남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오늘날에도 로스차일드 가는 세계 곳곳에서 거대 금융재벌로 큰 영향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오늘날 로스차일드 가가 소유·운영하고 있는 금융그룹은 크게 3개의 분야로 나뉩니다. 첫째는 스위스에 본사가 있는 에드몽 드 로쉴드 그룹(Edmond de Rothschild Group)으로, 부유층들의 자산 운용을 담당하는 에드몽 드 로쉴드 민간은행(Banque privée Edmond de Rothschild)과 와인 생산농장을 운영하는 에드몽 드 로쉴드 남작 양조회사(Compagnie Vinicole Baron Edmond de Rothschild) 등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둘째는 프랑스 파리에 본사가 있는 로스차일드 그룹(The Rothschild Group)으로 프랑스와 영국의 투자은행들인 로쉴드 은행 (Rothschild & Cie Banque)과 엔엠 로스차일드 앤 선즈(N. M. Rothschild & Sons) 은행, 부유층의 프라이빗 뱅킹과 기업의 인수·합병 등에 대한 자문 등을 담당하는 로스차일드 은행(Rothschild Bank) 등을 거느린 금융 지주회 사이다. 셋째는 투자신탁 업무를 담당하는 알아이 티 캐피털 파트너스 (RIT Capital Partners)입니다.

    한편, 로스차일드 가는 이스라엘의 건국에도 영향을 끼쳤습니다. 이들은 시오니즘 운동에 자금을 지원해 1917년 영국 외무장관 밸푸어(Balfour)가 팔레스타인에 유대인 국가를 수립하는 것에 동의한다고 발표한 밸푸어 선언을 이끌어냈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이 건국될 때에도 많은 자금을 지원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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